나는 강의 가장자리에서
발뒤꿈치를 흙에 박고 선다
어두운 풀잎이 발목을 핥고
젖은 흙냄새가 귀를 열어 둔다
강은 내 이름을 부르지 않지만
내 숨의 높이를 기억한다
초승달은 물빛 위에 얇게 눕고
바람은 갈대 끝을 세워 경계를 긋는다
그 경계 안에서 나는
두 손을 주머니에 넣지 못한다
손을 꺼내면 떨림이 보일까 두려워
나는 돌멩이의 온도를 먼저 만진다
낮의 열이 남은 돌은 거의 없고
대부분의 돌은 밤의 체온을 닮아 간다
어느 돌은 등을 돌린 짐승 같고
어느 돌은 오래 잠긴 문고리 같다
나는 돌의 무게를 바꿔 들며
오늘이 어제보다 덜 무너지길 빈다
그러나 빈다는 말이 길어질수록
목 뒤의 근육은 더 단단해진다
멀리 보의 철문이 잠긴 소리
보이지 않는 곳에서 낡은 금속이 맞물린다
그 소리를 들을 때마다
내 가슴 안쪽에서도 작은 빗장이 내려온다
금방이라도 무너질 것 같은 벽은
바깥보다 안쪽에 먼저 생긴다
내가 붙들고 있던 표정 하나가
물비린내와 함께 손가락에서 미끄러지고
나는 입술 안쪽을 깨물며
아직 아무 일도 없다고 스스로를 속인다
강가의 검은 나무들은
서로의 그림자를 겹쳐 울타리를 만든다
울타리 너머에서 부엉이가 운다
짧고 낮은 소리, 끊어지는 숨
한 번, 두 번, 세 번째에는
내 어깨가 먼저 움츠러든다
나는 어둠의 깊이를 재려다가
발끝으로 물을 건드리고 만다
둥근 파문이 퍼지며
어디까지가 땅이고 어디부터가 두려움인지 흐려진다
가끔 나는 물을 향해
느리다, 라고 중얼거린다
그 말이 물 위에 오래 남을 줄 알았는데
말은 금세 가라앉고
내 목구멍만 더 마른다
강은 대답하지 않는다
대답 대신 작은 소용돌이를 보낸다
돌 틈에 걸린 잎사귀 하나가
빙글 돌다 멈추다를 반복하고
그 미세한 망설임이 내 심장 박동을 닮는다
오늘 낮, 마을 방송차는
산사태 경보를 두 번 읽었다
첫 번째는 공식 같았고
두 번째는 사람의 떨림이 섞여 있었다
나는 장화를 말리던 손으로
대문 걸쇠를 세 번 확인했다
헛간 창문을 닫고
창문 틈을 다시 눌러 보고
전등 스위치를 올렸다 내리며
불빛의 흔들림까지 세고 있었다
누군가는 그것을 조심성이라 부르겠지만
나는 안다
내 마음의 안쪽에서
정밀추적이 끝나지 않았다는 것을
빗방울의 간격, 바람의 방향,
흙 냄새의 진하기,
전깃줄이 한 번 떨리는 높이,
이웃집 개가 짖고 멈추는 시간,
문고리에 맺힌 습기의 두께,
나는 전부 기록하려고 애쓴다
기록은 나를 살려 줄 것 같아서
나는 작은 수첩을 젖은 셔츠 안에 넣고
손전등 불빛을 낮춘 채 줄을 긋는다
하지만 줄을 긋는 손도 사람의 손이라
자꾸만 떨림을 남긴다
숫자 옆에 번진 잉크가
오늘 밤의 얼굴처럼 퍼지고
나는 번짐을 긁어내지 못한 채
다음 칸으로 넘어간다
다음 칸도 금세 젖는다
비는 아직 시작되지 않았는데
지붕 아래 공기는 먼저 젖어 있다
나는 처마 끝에서 떨어지는
보이지 않는 예고를 듣는다
한 방울도 없는데
이미 물소리가 난다
어둠이 먼저 흐르다
물은 그 뒤를 따라올 거라는 확신
그 확신이 내 무릎을 무겁게 만든다
나는 오래 앉아 있던 자세를 풀지 못하고
같은 돌 위에서 발목만 굴린다
강 건너 밭두렁에는
지난가을 묻은 비닐이 반쯤 드러나 있다
바람이 불 때마다
비닐 끝이 달빛을 긁어 간다
나는 그 소리를 들으며
어릴 적 여름의 냇가를 떠올린다
발목까지 오는 물,
미꾸라지가 스치는 감촉,
웃음이 먼저 튀던 목소리,
그러나 추억은 늘 오늘의 불안보다 짧다
짧은 추억이 사라지면
다시 강의 어두운 표면이 남는다
표면은 매끈하지만
그 아래는 보이지 않는다
나는 보이지 않는 것을 가장 무서워한다
보이지 않는 균열,
보이지 않는 압력,
보이지 않는 붕괴의 시간,
이름을 붙이면 안심될까 싶어
나는 입속으로 단어를 계속 접는다
조금만 더 낮아지면 좋겠다
수위가 아니라 내 숨의 높이가
조금만 더 느려지면 좋겠다
심장이 아니라 밤의 속도가
그러나 밤은 다정하지 않고
다정하지 않다는 사실이
오히려 정확해서 무섭다
나는 혀끝에 남은 흙맛을 삼키며
내 안의 공포가 어디서 시작되는지 더듬는다
시작점은 늘 옅고 끝점만 진하다
강을 건너오는 바람 속에는
젖은 풀의 체온이 있다
그 체온이 손등에 닿을 때
나는 잠깐 사람의 기척을 믿는다
멀리서 들리는 발자국은
실은 가지가 부러지는 소리일 뿐인데
나는 그 소리를 누군가의 귀환으로 오해한다
오해가 깨질 때마다
가슴 속의 빈칸이 하나 더 늘어나고
나는 빈칸을 손톱으로 눌러 펴 본다
검은 물 위로 달빛이 길게 깔리면
나는 그 길이 진짜 길인지 의심한다
건너갈 수 없는 길이
왜 이렇게 또렷한가
또렷함은 때로 함정 같아서
나는 빛의 가장자리만 밟는다
한 걸음, 멈춤,
다시 한 걸음, 긴 숨,
발밑의 자갈이 미끄러질 때
내 이름보다 먼저 비명이 올라온다
비명은 밖으로 나오지 못하고
치아 사이에서 잘린다
잘린 소리는 혀 밑에 쌓여
짧은 쇳가루처럼 남는다
나는 쇳가루를 삼키지 못해
침을 삼키는 흉내만 낸다
흉내가 길어질수록
목은 더 단단해지고
눈꺼풀은 모래를 뒤집어쓴 듯 무거워진다
나는 그래도 눈을 감지 않는다
눈을 감으면 더 많은 장면이 온다
낮에 본 경사면,
균열처럼 갈라진 흙,
비닐 아래 숨은 빈 구덩이,
아이들 자전거 바퀴 자국,
그 위를 덮은 새 발자국,
모든 것이 한꺼번에 무너지는 상상,
상상보다 빠르게 뛰는 맥박,
나는 그 맥박을 두 손으로 잡아
강물 쪽으로 눌러 보려 한다
강은 내 손을 받아 주지 않고
다만 작은 물결 하나를 보낸다
그 물결이 발등에 닿을 때
나는 고개를 들지 못한다
고개를 들면 하늘이 너무 가까워서
어둠이 바로 쏟아질 것 같기 때문이다
나는 시선을 낮춰
내 그림자의 윤곽만 확인한다
윤곽이 흐려지면 아직 버틸 만하고
윤곽이 선명해지면 오히려 불안하다
밤의 중간쯤에서
마을 확성기가 다시 켜진다
짧은 안내, 길지 않은 경고,
그러나 그 짧음이 더 날카롭다
나는 수첩 마지막 페이지에
시간 하나를 적고
옆칸에 아무 말도 쓰지 못한다
말이 들어갈 자리에
손의 떨림만 길게 남는다
떨림은 누가 봐도 문장 같지 않다
문장 같지 않은 흔적을
나는 버리지 않고 접어 둔다
내일의 내가 펼쳐 보면
오늘의 공포를 측정할 수 있을까
측정할 수 있다면
아마 덜 무서울까
나는 답을 모르면서도
질문을 지우지 못한다
지우개 가루처럼 하얀 안개가
강 위로 얇게 눕는다
안개는 천천히 올라와
내 무릎을 덮고 허리를 덮고
마침내 턱밑까지 올라온다
나는 입을 닫은 채
안개의 맛을 본다
물과 흙과 금속이 섞인 맛
먼 기억의 밑바닥 같은 맛
나는 그 맛을 견디며
아직 집으로 돌아가지 않는다
돌아가면 더 크게 들릴까 두렵다
두려움은 언제나
집 안에서 더 선명해졌다
벽이 소리를 반사하고
천장이 숨을 눌러
작은 떨림도 확대해 주었으니까
차라리 여기서
바람과 섞여 있는 편이 낫다
강은 거짓 위로를 하지 않고
그 무심함이 오히려 진실에 가깝다
나는 무심한 것 옆에서 겨우 안도한다
한 시간쯤 더 지나
첫 빗방울이 손등에 찍힌다
차갑고 정확한 점 하나
곧 두 번째 점,
세 번째 점,
점들이 이어져 선이 되고
선들이 겹쳐 면이 된다
나는 우의를 꺼내지 못한 채
빗줄기의 각도를 눈으로 따라간다
시야가 젖어도 눈을 떼지 못한다
젖은 세상은 윤곽을 흐리지만
이상하게도 마음은 또렷해진다
무너질 수 있다는 사실과
아직 무너지지 않았다는 사실 사이에서
나는 아주 가늘게 서 있다
그 가느다란 자리에서
내 숨이 다시 흐르다 멈추고
멈춘 숨이 다시 흐르다 이어진다
이어지는 동안만큼은
내가 아직 여기 있다는 확신이 생긴다
새벽이 가까워질수록
빗소리는 고르게 깔리고
갈대는 허리를 더 깊이 숙인다
나는 마지막 페이지에
한 줄을 더 적는다
오늘 밤,
나는 무너지지 않았다
쓰고 나니 문장이 너무 단순해서
오히려 믿을 만하다고 느낀다
나는 수첩을 닫고 젖은 손을 턴다
돌아서는 길의 진흙은
발목을 붙잡아 느리게 만든다
나는 그 느림을 거부하지 않는다
빠르게 도망치는 몸보다
천천히 확인하는 몸이
오늘의 나를 더 오래 지켜 줄 것 같아서
뒤를 돌아보면 강 위의 안개가
아직 낮은 호흡으로 흔들리고
그 흔들림이 멀리서도 보인다
나는 그 흔들림을 품은 채 집으로 간다
문 앞에 다다르면
젖은 신발에서 작은 강이 흘러내리고
현관의 검은 타일 위로
밤의 지도 같은 자국이 번진다
나는 자국을 닦지 않고 잠시 둔다
지워 버리면 아무 일도 없었던 것 같아
오히려 더 불안해질 것을 알아서
젖은 냄새가 방 안으로 퍼지는 동안
나는 창문을 반쯤만 열어 둔다
새벽의 차가운 공기가 이마를 식히고
멀리 남은 빗소리가 아직 살아 있음을 알린다
그 살아 있음이 두렵고 또 고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