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급 기록 47-11. 너는 새벽 네 시 열세 분에 급수대 앞 줄에 섰고, 철제 통 두 개를 받아 장막 구역 C-12로 이동했다. 기록지 하단에는 너의 손등에 찍힌 번호와 어젯밤 체온, 오늘 배정된 작업 칸이 적혀 있었다. 종이는 축축했고 잉크는 번져서 이름의 마지막 글자를 삼켜 버렸다. 이름이 흐려진 칸을 바라보는 동안, 뒤쪽에서 아이가 울었고 경비등은 꺼졌다 켜지기를 반복했다. 보고서라는 형식은 네 하루를 단정하게 묶어 놓는 것 같지만, 네가 아는 시간은 그런 식으로 접히지 않았다. 줄 끝에서 밀려온 숨과 군홧발 소리, 물이 통 벽을 치는 얇은 진동, 천막 천이 바람을 받아 나는 갈라진 소리까지 모두 한 덩어리로 달라붙어 있었다. 너는 숫자처럼 보이도록 숨을 고르고, 감정을 지운 얼굴로 걸음을 맞췄다. 그게 이곳에서 살아남는 첫 번째 규칙이라고 배웠기 때문이다.
아침 작업은 경계 철조망 바깥의 임시 시장에서 시작됐다. 표지판에는 구호 물품 재배치라고 적혀 있었지만, 실상은 해체된 도시에서 넘어온 물건을 다시 값으로 바꾸는 일이었다. 낡은 전등, 뚜껑 없는 냄비, 한쪽 렌즈가 깨진 고글, 젖은 담요와 고장 난 라디오가 네 앞을 지나갔다. 네 자리는 작은 가게 하나를 맡는 일이었는데, 가게라고 부르기엔 천막 조각 네 장과 접이식 상자 두 개가 전부였다. 그래도 사람들은 거기에 기대를 걸었다. 하루를 버틸 성냥 한 갑, 끓인 물 한 병, 바늘 한 개를 얻기 위해 손안의 마지막 물건을 내놓았다. 너는 물건의 상태를 말했고, 상대는 표정으로 흥정했다. 그때마다 너는 입 안에서 같은 문장을 굴렸다. 지금은 판단만 해라, 흔들리면 빼앗긴다. 누구의 사연을 오래 듣지 말고, 눈을 오래 마주치지 말고, 목소리를 한 톤 낮춰라. 말끝에서 연민이 새면 바로 약점이 된다는 걸 이미 여러 번 봤다.
점심 무렵, 두 번째 검문이 시작되었다. 경비대는 장막 사이를 훑으며 등록되지 않은 사람을 찾아냈고, 사람들은 본능처럼 등을 벽에 붙였다. 네 가게 앞에 선 노인은 동전 대신 접힌 사진 한 장을 내밀었다. 젊은 시절의 부부가 웃고 있었고, 뒤편에는 무너진 다리의 이름이 희미하게 찍혀 있었다. 노인은 사진을 내려다보며 말끝을 자꾸 삼켰다. 손녀가 열이 심해 약을 구해야 하는데, 오늘 배급표를 잃어버렸다고 했다. 너는 규정상 사진을 받을 수 없다고 말했다. 목이 바싹 말랐지만 목소리는 놀랄 만큼 단단했다. 노인은 고개를 끄덕였고, 사진을 거두는 손이 종이보다 더 가벼워 보였다. 그 장면이 지나간 뒤에도 너는 한참 같은 자리에서 손가락만 접었다 폈다 했다. 너는 그런 표정 앞에서 조금도 주저하다가 들키지 않으려고 더 냉정한 말을 고르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누구보다 네가 먼저 알고 있었다.
해가 지기 전에 비상 사이렌이 한 번 울렸다. 인근 보급 창고에서 불이 났고, 바람 방향이 캠프 쪽으로 틀렸다는 방송이 반복됐다. 사람들은 물통과 이불을 들고 통로를 뛰었다. 너는 가게 앞의 상자를 접어 등에 묶고, 장막 구역으로 돌아오다 보급로가 막힌 것을 봤다. 통로는 한 줄로 좁아졌고, 누군가는 먼저 지나가려 팔꿈치로 남의 늑골을 밀었다. 아이를 안은 여자는 넘어질 듯 휘청였고, 그 뒤에서 욕설이 뱉어졌다. 너는 잠깐 멈췄다. 멈추는 순간, 뒤에서 밀려온 몸들이 네 등을 밀었다. 그때 네 눈에 낮에 보았던 그 노인이 들어왔다. 그는 한 손으로 소녀의 어깨를 감싸고 다른 손으로 종이봉투를 움켜쥔 채, 사람들 틈에서 거의 떠밀리듯 서 있었다. 봉투 끝에서 약 포장지가 보였다. 누군가의 사정을 믿지 않던 네 판단이, 그 얇은 비닐의 반짝임 앞에서 갑자기 낡은 못처럼 삐걱거렸다.
밤이 깊어질수록 연기 냄새는 낮은 천장 밑에 눌어붙었다. 장막 안으로 돌아온 사람들은 각자 받은 물과 빵을 세어 보며 목소리를 죽였다. 네 맞은편 칸에는 새로 들어온 가족이 자리를 폈는데, 아이는 잠들지 못해 손바닥으로 귀를 막고 있었다. 멀리서 기침 소리가 일정한 간격으로 이어졌고, 누군가는 젖은 천을 짜서 문턱에 걸어 두었다. 너는 바닥에 펼친 체크무늬 천 위에서 무릎을 세운 채 벽을 봤다. 낮에 쓰다 남은 기록지가 무릎 위에 있었고, 너는 무심코 빈칸에 단어 하나를 적었다. 고단하다. 문장으로 묶지 않고 낱말 그대로 적는 편이 이곳의 숨과 더 닮아 있었다. 피로는 설명보다 빠르게 몸에 스며들고, 두려움은 이유보다 먼저 손끝을 차게 만든다. 너는 종이를 반으로 접었다가 펼치며, 내일은 조금 덜 흔들리기를 바랐다.
새벽 경계 교대 직전, 빗방울이 장막 천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드문드문 떨어지던 소리가 곧 촘촘한 박자가 됐다. 누수 자국이 있던 모서리에서 물이 떨어져 빈 캔 바닥을 치자, 쇳소리가 밤의 뼈처럼 울렸다. 너는 통로 끝 급수대로 나가서 빈 통을 다시 채웠다. 비를 맞은 흙길은 금방 진흙으로 풀렸고, 사람들이 지나간 자국이 겹겹이 얕은 도랑을 만들었다. 어둠 속에서 얼굴들은 쉽게 식별되지 않았지만, 걸음걸이는 다 알아볼 수 있었다. 한쪽 다리를 끄는 남자, 숨이 짧아 자주 멈추는 여자, 아이를 업고도 속도를 잃지 않는 십대의 어깨. 네 걸음도 그중 하나였다. 살아 있다는 증거가 거창한 선언이 아니라 미끄러운 길에서 넘어지지 않으려는 균형이라는 걸, 너는 몸으로 익혀 가는 중이었다.
며칠 뒤, 기록 반장은 네게 창고 정리 보조를 맡겼다. 배급표 원본과 사본을 대조하고, 분실 신고 건을 분류해 임시 승인 도장을 찍는 일이었다. 종이 더미 사이에서 너는 낮에 본 노인의 이름을 다시 발견했다. 이름 옆에는 붉은 펜으로 취소 표시가 그어져 있었다. 사유는 본인 확인 불가. 규정대로라면 그 표시는 최종이었다. 하지만 너는 그 옆칸에 남은 빈 공간을 한참 바라보다가, 보정 대기라는 새 표기를 넣었다. 작은 획 하나를 더하는 일에 심장이 이렇게 빨리 뛸 줄은 몰랐다. 누가 보면 사소한 수정이라 여길 것이다. 너도 그렇게 믿고 싶었다. 그런데 그 사소함이 너를 오래 붙들었다. 규정은 대체로 틀리지 않지만, 틀리지 않다는 말이 언제나 사람을 살린다는 뜻은 아니라는 사실이 너를 잠 못 들게 했다.
당일 저녁, 노인은 약 봉투를 가슴에 안고 네 앞에 섰다. 소녀의 열은 조금 내렸고, 아직 밤마다 식은땀을 흘린다고 했다. 노인은 연신 고개를 숙였고, 너는 고개를 들라고 말하지 않았다. 대신 상자 아래 숨겨 둔 건빵 두 봉지를 꺼내 봉투 위에 올려놓았다. 노인은 몇 번이나 거절하다가 결국 받아 들었다. 그때 옆 통로에서 경비대 두 명이 다가오는 모습이 보였다. 너는 자연스럽게 장부를 펼쳐 노인의 이름이 적힌 줄 위에 손을 올렸다. 경비대는 물품 재고를 묻고 지나갔다. 짧은 문답이 끝난 뒤에도 네 손바닥은 젖은 채였다. 네가 방금 한 일이 대단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다만 이전의 너라면 하지 않았을 일을 했다는 감각이 남았다. 그 감각은 얇았지만, 얇은 것들이 의외로 오래 버틴다는 걸 이곳에서 배웠다.
그날 밤, 하늘에는 구름 사이로 반달이 걸려 있었다. 천막 끝이 바람에 들릴 때마다 달빛이 장막 안으로 잘려 들어왔다가 사라졌다. 너는 바닥에 누워 반쯤 감긴 지퍼 틈으로 빛의 모양을 세었다. 반달은 완성되지 않은 원처럼 보였고, 그래서 오히려 믿을 만했다. 다 채워지지 않은 것이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뜻이기도 하니까. 너는 오래전에 잊었다고 생각한 문장을 떠올렸다. 사람은 한 번 정한 방식으로만 살지 않는다. 필요하면 몸이 먼저 길을 바꾼다. 너는 그 문장을 입 밖으로 내지 않았다. 다만 가슴 안쪽에서 조용히 되풀이했다. 그리고 내일의 순번표를 접어 베개 밑에 넣었다. 종이 모서리가 손끝을 스칠 때마다 오늘의 선택이 꿈이 아니라는 사실이 분명해졌다.
다음 주부터 비축 식량이 줄어든다는 공지가 붙었다. 사람들은 게시판 앞에서 소문을 분해하고 조합하며 각자의 계산을 시작했다. 일부는 경계 밖으로 나가 보급 차량을 직접 맞겠다고 했고, 일부는 가족 단위로 구역을 옮길 준비를 했다. 너는 움직이는 사람들을 보며 마음속에서 오래 굳은 문장을 하나씩 떼어 냈다. 어차피 바뀌지 않는다, 누구도 믿지 마라, 나 하나 지키기도 벅차다. 그 문장들은 너를 안전하게 만들었지만 동시에 좁게 만들었다. 너는 좁아진 자리에서 타인의 숨이 어디까지 들고 나는지 보지 못했다. 그래서 이제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려는 허세 대신 작고 반복 가능한 약속을 세웠다. 하루에 한 번은 누군가의 말을 끝까지 듣기. 하루에 한 번은 규정의 틈을 확인하기. 하루에 한 번은 지켜야 할 선과 넘어도 되는 선을 구분하기.
보급 차량이 도착한 날, 먼지는 낮게 깔린 안개처럼 통로를 가렸다. 너는 배정표를 들고 줄을 정리하다가 뒤엉킨 인파 한가운데서 다시 그 소녀를 보았다. 아이는 여전히 마른 기침을 했지만, 노인의 손을 놓치지 않았다. 그들을 지나친 뒤에도 너의 시선은 이상하게 자꾸 뒤로 돌아갔다. 네가 살아남기 위해 배운 것들, 누군가를 외면해야만 버틸 수 있다고 믿었던 시간, 그 시간들을 부정하지는 않았다. 다만 그 위에 다른 습관을 덧댈 수 있다고 이제는 믿게 됐다. 살아남는다는 말은 남을 밀어내는 기술만을 뜻하지 않는다. 때로는 서로의 무게를 잠깐 나눠 들고, 각자 다시 자기 자리로 돌아갈 수 있게 버티는 기술이기도 하다.
작업 종료 방송이 울릴 무렵, 너는 장부 마지막 칸에 짧은 메모를 남겼다. 임시 조정 완료. 그리고 그 아래, 누구에게도 제출하지 않을 문장 하나를 덧붙였다. 다시. 한 단어뿐인 기록이었지만, 너는 그 단어를 쓰기 위해 오래 돌아왔다고 느꼈다. 어둠이 내려앉은 통로를 걸어 장막으로 돌아오는 길, 발끝에 부딪히는 자갈 소리가 이상하리만큼 또렷했다. 오늘의 너는 어제의 너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여전히 피곤했고 여전히 경계했고 여전히 쉽게 웃지 못했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너는 변화를 사건으로 기다리지 않고 습관으로 만들어 가기 시작했다. 그 사실이 너를 과장되게 구원하지는 않았다. 다만 내일 아침 줄을 설 때, 네 등이 어제보다 조금 덜 굳어 있을 것이라는 예감은 주었다.